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방훈의 난 (문단 편집) === 사주 공방전 === 조정에서는 우금오 대장군 강승훈을 의성 절도사 서주행영도초토사로 삼고, 신무 대장군 왕안권을 서주북면행영초토사로 삼고, 우림 장군 대가사를 서주남면행영초토사로 삼아서, 여러 도의 군사를 크게 발동하여 방훈을 치게 했다. 강승훈은 [[사타족]]의 사자인 주야적심과 토욕혼, 달단, 글필의 추장에게 각기 무리를 인솔하고 자기를 따르게 해달라고 청하니, [[당의종]]이 조서를 내려 허락했다. 방훈은 이원이 사주를 공격하였으나 오랫동안 이기지 못하자, 오형을 파견하여 이원을 대신하게 했다. 11월 17일 다시 사주를 공격하였는데, 이때 칙사 곽후본이 회남의 군사 1,500명을 거느리고 사주를 구원하려고 하여 홍택에 이르렀으나, 반란군이 강한 것을 두려워하여 감히 나아가지 않았다. 이에 신당이 곽후본에게 가서 구원해주기를 요구하게 해달라고 청하자, 두도가 허락했다. 18일 밤, 신당은 작은 배를 타고 숨어서 회하를 건너서 홍택에 도착하여 곽후본에게 유세하였으나 듣지 않자, 밝을 즈음에 다시 돌아왔다. 20일에 반란군이 더욱 거세게 공격하면서 수문에 불을 지르려 하니, 성 안에서는 거의 막을 수 없었다. 신당이 다시 가서 구원해주기를 요구하겠다고 청했다. 이에 두도가 물엇다. >"앞서 갔다가 헛되이 돌아왔는데, 지금 가서 무슨 이익이 있겠소?" 신당이 말했다. >"이번에 가서 군사를 얻게 되면 살아서 오겠고, 얻지 못하면 죽을 것입니다." 두도가 그와 울면서 헤어졌다. 신당은 다시 작은 배를 타고 문짝을 짊어지고 포위망을 뚫고 나가서 곽후본을 만나 구원을 호소했다. 곽후본이 곧 그 말을 따르려 하였는데, 회남의 도장 원공변이 반대했다. >"역적의 형세가 이와 같으니 스스로 보위하는 것도 부족할까 걱정인데, 어느 겨를에 다른 사람을 구원하겠소?" 신당이 칼을 꺼내어 눈을 부릅뜨고 원공변을 위협했다. >"도적들이 백방으로 성을 공격하여 함락되는 것이 조석일 것인데, 공은 조서를 받고 구원하려고 하면서 두류하며 나아가지 않으니, 어찌 오직 위로 나라의 은혜를 저버리는 것뿐이겠소? 만약에 사주가 지켜지지 않는다면 회남은 드디어 야만인의 장소가 될 것인데, 공이 어찌 홀로 살아남을 수 있겠소? 나는 마땅히 공을 죽이고 나서 그칠 뿐이오." 신당이 그를 죽이려 하자, 곽후본이 그를 안아서 중지시켰고 원공변은 겨우 죽음을 면했다. 신당은 돌아서서 멀리 사주를 바라보고 하루종일 통곡하니, 사졸들은 모두 그 때문에 눈물을 흘렸다. 결국 곽후본은 500명을 그에게 주고 장사들에게 함께 갈 거냐고 물었고, 장사들은 모두 가기를 원했다. 신당은 장사들에게 감사를 표한 뒤 그들을 이끌고 회수의 남쪽 강안에 이르렀다. 반란군이 멀리서 성을 공격하는 것이 보이자, 어떤 군리가 말했다. >"역적의 형세가 성에 들어간 것 같으니 돌아가는 것이 편하겠다." 신당은 격분하여 군리의 수염을 잡고 칼을 들어서 치려고 했다. 사졸들이 다같이 그를 구원하며 말했다. >"1천 500인의 판관이니 죽일 수는 없습니다." 신당이 말했다. >"진지에 와서 망령된 말로 여러 사람을 현혹시키는 것은 반드시 놓아줄 수 없다." 무리들은 요청하여도 들어주지 않자 마침내 함께 칼을 빼앗으려 하였다. 하지만 신당은 힘이 세서 무리들이 빼앗을 수 없었다. 신당이 "장사들이 배에 오르면 이 사람을 놓아주겠다"고 하자, 무리는 다투어 배에 올랐고, 그때서야 비로소 군리를 놓아줬다. 그 후 신당은 무리를 이끌고 회수의 북쪽까지 가서 반란군을 공격했고, 두도가 성 위에 군사를 늘어놓고 그와 더불어 호응하니, 반란군은 패하여 달아났다. 두도와 신당 등은 이들을 추격하다가 포시에 이르러 돌아왔다. 또다시 패배했다는 소식을 접한 방훈은 장수 유길을 파견하여 정예군 수천 명을 거느리고 오형을 도와 사주를 공격하게 하고, 호주에 있던 유행급은 장수 왕홍립을 파견하여 사주 공격을 지원하게 하였다. 11월 29일 진해 절도사 두심권이 도두 적행약을 파견하여 4천 명을 거느리고 사주를 구원하게 하였다. 30일 적행약이 사주에 도착하자, 반란군이 회남에서 맞아 치면서 그를 포위했다. 사주 성안에는 군사가 적어서 구원해 줄 수 없었고, 적행약과 사졸들은 다 죽었다. 한편, 회남 절도사 영호도가 이상을 파견하여 군사 수천 명을 거느리고 사주를 구원하였는데, 곽후본, 원공변과 함께 군사를 합하여 도량성에 주둔하여 회수를 사이에 두고 서로 바라봤다. 반란군은 적행약을 격파한 뒤 승리의 기세를 타 이상, 곽후본, 원공변을 공격했다. 12월 5일 이상 등이 나가서 싸우다가 대패하였고, 반란군은 도량성을 함락시킨 뒤 이상과 곽후본을 잡아서 서주로 호송하였고, 회구를 점거하니 사주의 조운과 역참의 길이 끊겼다. 강승훈이 신흥에 진을 치자, 반란군 장수요주가 유자에 주둔하고 군사를 내어 막았다. 강승훈은 중과부족이라 여기고 물러나 송주에 주둔했다. 방훈은 장수 정종실 등을 나누어 파견하여 수천 명을 거느리고 남쪽으로 가서 서, 여를 노략질하고, 북쪽으로 기, 해를 침범하여 술양, 하채, 오강, 소현을 격파하고 저주를 공격하여 함락시키고 자사 고석망을 죽였다. 또 화주를 노력질하니 자사 최웅이 사람을 파견하여 쇠고기와 술을 가지고 그들을 대접하고, 누각에 올라가서 같이 술을 마셨으며, 군사들에게 명령하여 모두 갑옷을 벗게 하고 아끼는 두 사람을 가리켜 자제라고 하면서 그를 온전하게 해달라고 빌며, 그 나머지는 오직 반란군이 처리하게 하였다. 이에 반란군이 화주성을 크게 약탈하고 사졸 800여 명을 죽였다. 이 무렵, 사주성에서는 양식이 다하여 사람들이 묽은 죽을 먹었다. 윤12월 10일에 신당이 두도에게 말하여 나아가 회, 절에서 구원병을 구하도록 하게 해달라고 청하여 허락을 받은 뒤, 밤중에 결사대 10명을 인솔하고 장가부를 잡고 작은 배에 올라 몰래 가서 반란군의 수채(물에 세운 군사 영채)를 찍어버리고 나갔다. 다음날 아침 반란군이 이를 알아차리고 다섯 개의 배를 가지고 그 앞을 차단하고 5천 명으로 양쪽 하안에서 추격하였다. 반란군의 배는 무거워서 가는 것이 느렸지만, 신당의 배는 가벼워서 가는 것이 빨랐다. 그 덕분에 추격을 겨우 피하고 30여 리를 가서야 마침내 죽음을 면할 수 있었다. 윤12월 14일 양주에 도착한 신당은 영호도를 찾아가다가 15일에 윤주에 이르러 진해절도사 두심권을 만났다. 두심권은 압아 조익에게 갑사 2천 명을 거느리고 회남과 더불어 쌀 5천 곡과 소금 500곡을 운반하여 사주를 구원하게 하였다. 이때 서주남면행영초토사 대가사는 군사 3만을 거느리고 회하를 건너서 돌아다니며 싸우면서 앞으로 나아가니, 반란군은 회남의 수비를 다 버렸다. 대사가 먼저 회구를 탈취하고 뒤에 사주를 구해주려고 하여 도량성을 포위하였다. 반란군은 성 위에서 절하며 말했다. >"바야흐로 도두와 논의하고서 나가서 항복하겠습니다." 대가사는 이를 믿고 5리를 물러났다. 반란군은 밤중에 도망하였고, 다음날 아침에는 성이 텅 비어 있었다. 대가사는 도량성을 점거한 뒤 반란을 곧 토벌할 수 있으리라 여기고 방심했다. 그날 안개가 대단히 낀 틈을 타, 반란군 장수 왕홍립이 군사 수만 명을 이끌고 샛길로 빠르게 진군하다가 적진을 습격했고, 관군은 대패하여 반란군에게 죽거나 회수에 빠져 죽었다. 죽음을 면한 사람은 겨우 수백 명이었고, 잃어버린 기계, 물자와 양곡, 거마는 1만을 헤아렸다. 대가사와 감군, 장교들은 모조리 목이 베어져 팽성에 전해졌다. 대가사의 3만 군대를 궤멸시킨 뒤, 방훈은 스스로 천하에 대적할 사람이 없다고 생각하고 노포를 만들어 흩어서 여러 영채와 향촌에 보이게 했다. 이에 회남의 사민들은 떨고 두려워하여 피난지인 강좌로 갔다. 영호도는 그가 침범할까 두려워하여 사자를 파견하여 방훈에게 "절월을 요청하는 주문을 올리겠다"고 설득했고, 방훈은 마침내 군사 활동을 쉬고 명령을 기다렸다. 이 덕분에 회남은 점차 흩어졌던 병졸을 모아 수비를 갖췄다. 반란군은 대가사를 섬멸한 기세를 타 수주를 포위하고 여러 도에서 공헌하는 물건과 상인들의 화물을 약탈하였다. 방훈이 더욱 교만해져 매일 연회를 베풀자, 주중이 간했다. >"옛날부터 교만하고 사치하며 일락하면 얻었다가 다시 잃게 되고, 이루었다가 다시 패배하는 일이 많습니다. 하물며 아직 얻지도 못하고 성공하지도 않았는데, 이런 일을 하는 사람이겠습니까?" 그러나 방훈은 듣지 않았다. 그러다가 여러 도의 군사가 송주에 크게 모이자, 서주에서는 비로소 두려워하였고, 백성들의 호응도 약해져서 여러 영채에서는 군사를 더 보태 달라는 요구가 이어졌다. 방훈은 무리를 흩어서 향촌으로 들어가게 하여 사람을 몰아서 병사로 삼게 했다. 또 현재의 군사가 수만 명에 이르렀으나 물자와 양식이 고갈되자, 부자와 상인들의 재산을 거둬들여 열에 일고여덟을 빼앗고, 재물을 감추었다는 죄에 걸려서 가족이 주멸되는 집안이 수백 호였다. 또한 방훈과 함께 군사를 일으켰던 교병들은 더욱 교만하고 횡포하여 다른 사람의 재산을 빼앗고 부녀자를 약탈하였으나, 방훈은 이를 통제할 수 없었다. 이로 인해 서주 백성들은 반란군을 적대하기에 이르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